2025/05/19

제2의 솔로몬을 꿈꾸는 이들에게 2 : 일천번제와 기도

 #일천번제_솔로몬은 과연 일천번제(천 번의 번제)를 꼭 드릴 필요가 있었을까?

“굳이 천일번제를 드릴 필요가 있었는가?”

먼저, 율법에 규정된 제사와의 비교, 그리고 하나님이 제사를 통해 진짜 원하셨던 것을 기준으로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율법에서 명하신 번제의 규정과 의미

#번제(Burnt offering, 히브리어: עולה ‘올라’)

레위기 1장에서 규정된 제사로,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이며, 전체를 하나님께 불태워 드리는 온전한 헌신의 상징입니다.

핵심 규정 (레위기 1장 기준):

  •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원하여 드림 (레 1:3)
  • 흠 없는 수컷 제물
  • 제물 전체를 번제단에서 불태움
  • 제사를 통해 속죄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추구

의미:

  • 전적인 헌신
  • 자발적 순종
  •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의 표현
즉, 번제는 율법이 정한 횟수나 수량이 아닌 ‘진심’이 중심입니다.
번제 횟수  : 정해진 절기와 경우에 따라 규칙적, 상징적
번제 장소  : 회막/성막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에서
번제 목적  : 죄사함, 헌신, 교제 등 분명한 목적

2. 솔로몬의 일천번제 : 율법적 기준에서 벗어난 ‘의도된 과잉’?

  • 열왕기상 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살펴본 것처럼 일천 번제는 율법에 명시된 규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솔로몬의 자발적 결정이었습니다. 율법적으로는 “많이 드릴수록 더 많은 은혜 받는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 번제의 방식, 횟수, 의미를 분명히 규정하셨습니다 (레위기, 민수기).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율법을 철저히 따르기보다는, 인간적인 의도나 방식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추측 : 

1) 간절한 두려움의 가능성

열왕기상 3장 1–4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 초기 통치 시점입니다:

  1.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름 (왕상 2장)
  2. 정적들(아도니야, 요압 등)의 숙청과 정권 안정화 (왕상 2장 후반)
  3. 이후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 (왕상 3:4)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건축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회막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습니다 (대하 1:3 참조).

그래서 솔로몬은 가장 큰 산당이었던 기브온에 가서 일천번제를 드리고,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묻습니다.

  • 열왕기상 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 열왕기상 3: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왕으로 추대될 당시의 배경은 단순한 평화로운 승계가 아니라, 왕권을 둘러싼 위기 상황 속에서의 긴급한 등극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장)

다윗 왕은 매우 노쇠하여 병상에 누워 있었고 왕으로서의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이를 틈타 주변에서는 차기 왕위를 놓고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넷째 아들로, 당시 왕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력한 왕자였습니다. 아도니아가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 등 당시의 핵심인사들의 지지를 얻어 실질적인 왕권 찬탈을 시도 중인 가운데 (열왕기상 1:5-10), 나단과 밧세바의 개입으로 아슬아슬하게 왕이 된 솔로몬, 그는 우리아의 아내로 알려져있던 "밧세바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던 솔로몬은 출생 자체가 도덕적으로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요소였을 것 입니다.

아도니야(넷째 아들)는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믿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한 것을 보더라도 솔로몬은 전통적인 장자 계승 원칙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곧 백성들 가운데서도 솔로몬의 즉위를 반기지 않는 자들이 있을 수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내가 솔로몬이었다면 ᆢ'

아직은 어렸던 솔로몬에게 아버지 다윗만큼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훌륭한 왕이 되고 싶었던 꿈과 함께, 그에게는 그 수많은 시선들을 이기고 백성, 곧 사람들 앞에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하진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그 모든 추측을 뒤로하더라도 어린 나이와 통치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백성 앞에 서는 두려움과 부담감을 분명히 가졌을 가능성은 커 보입니다.

  • 열왕기상 3장 7절 히브리어 원문 (열왕기상 3:7 중)

 וְאָנֹכִי נַעַר קָטֹן לֹא אֵדַע צֵאת וָבֹוא

  • וְאָנֹכִי ve’anokhi 접속사 + 대명사 그리고 나는
  • נַעַר naʿar 명사 소년, 젊은이
  • קָטֹן qāṭōn 형용사 작다, 어린
  • לֹא lo 부정사 ~아니다
  • אֵדַע ’ēḏaʿ 동사 (ידע, 야다) 내가 알다 (미완료형)
  • צֵאת tset 명사형/동사원형 (יצא, 야차) 나가는 것
  • וָבֹוא u·vā·vo 동사원형 (בוא, 보) 들어오는 것

➡️직역 해석:

“그리고 나는 작은 소년이라,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문법 및 구문 해설:

1. “וְאָנֹכִי נַעַר קָטֹן”

‘나는 작은 소년입니다’

  • נַעַר (naʿar)는 단순히 '소년'만이 아니라 미성숙한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 קָטֹן (qaton)은 크기뿐만 아니라 지위나 경험의 부족을 나타냅니다.

2. “לֹא אֵדַע צֵאת וָבֹוא”

  • ‘출입(出入)’은 히브리어 관용어로, 삶을 이끌어가는 실천적 판단, 행동, 지도력 전반을 의미합니다.
  • 알지 못한다(לֹא אֵדַע)는 말은 단순히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할 능력과 지혜가 없음을 겸손히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즉, 히브리어 구문 ‘לֹא אֵדַע צֵאת וָבֹוא’는 단순한 문맹이나 무지의 고백이 아니라,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하나님 없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적 한계를 겸손히 드러내는 고백이자,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시작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와 지혜로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맡기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기뻐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 열왕기상 3:10–14

“이것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2) 고대 근동 문화의 영향 가능성

솔로몬 시대 주변국(애굽, 바벨론, 가나안 등)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사 관행이 있었습니다:

  • 숫자에 의한 종교적 상징성 (많을수록 신의 환심을 산다고 믿음)
  • 산당(높은 곳)에서 제사드림 → 영적 권위나 신접의 장소로 인식
  • 왕권 강화와 종교를 결합 →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 통치의 정당성 확보

솔로몬은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자라났고, 백성들도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일천 번제라는 이례적인 숫자는 고대 근동의 제사 문화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 과시 행위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3) 솔로몬의 신앙 상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시점은 솔로몬이 애굽 공주와 결혼동맹을 맺은 후 입니다.

  • 열왕기상 3:1: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성전건축 전이었고, 당시 솔로몬은 성전부지로 확정된 인구조사 후 다윗이 쌓은 제단도 아닌 여러 산당을 다니며 제사를 드리던 중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이유는 그곳이 크기가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 열왕기상 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그리고 열왕기상 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 구절은 두 개의 평가를 병치합니다:

  • 긍정: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윗의 법도를 따름
  • 부정: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함 (율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을 암시)

→ 이는 솔로몬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되, 그분을 깊이 아는 지식은 부족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왕권 안정 후, 외교적 기반 다진 뒤 드린 제사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했지만(3:3), 일천번제는 이미 세속적 정치 계산과 결합된 신앙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일 수 있습니다.

애굽과 혼인 동맹은 훗날 이방 여인들과의 관계로 이어져 우상숭배와 신앙 타락의 서곡이 됩니다.(열왕기상 11장)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외형상 하나님께 드린 위대한 예배처럼 보이지만, 그 시기와 배경을 보면 이미 신앙과 정치가 혼합되기 시작한 초기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왜 그 제사를 받으셨는가?

비록 율법적 규정도 아니었고, 그의 동기가 어쩌면 순전한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그 밤에 꿈에 나타나 응답하셨습니다. (열왕기상 3:5)

하나님께서 왜 솔로몬에게 응답하셨는지 성경은 명확한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어설픈 신앙이었으나, 하나님께 향해 있는 그의 중심을 보셨을 수도 있고, 다윗과의 약속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일천 마리의 번제에 대한 감동은 아니었을 게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수많은 제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 사무엘상 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이사야 1:11~17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니라... 악을 행하는 것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라”
  •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율법 또한 양보다 중심, 횟수보다 진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제사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은혜로 받으셨지만, 그 제사의 양이 신앙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선 단 한 번도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기뻐하셨다거나 그와 같은 번제를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셨으니까요. 

오히려,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란 이름을 따로 지어주실 만큼 솔로몬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직은 어렸던 솔로몬의 수준에 하나님께서 맞춰주셨던 건 아니었을까요?

솔로몬의 불안과 두려움에 안심을 주고 싶으셨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이유 외에 나는 그 답을 찾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여디디야(히브리어: יְדִידְיָה Yedidyah)

여디디야는 하나님께서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서 태어난 두 번째 아들 솔로몬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 사무엘하 12장 24–25절 (개역개정):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여디디야_뜻_의미

여디디야 (Yedidyah) “여호와께 사랑받는 자” 하나님이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표시로 주신 이었습니다. 

반면, 솔로몬 (Shelomoh) “평화로운 자” 다윗 이후의 평화로운 통치를 상징합니다.

→ ‘솔로몬’은 정치적 이름이고, ‘여디디야’는 영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을까?

다윗과 밧세바의 첫 아들은 죄의 결과로 죽었고,

그 다음 아들 솔로몬은 회복과 은혜의 상징으로 태어났습니다.

“여디디야”는 솔로몬이 단순히 정치적 계승자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정체성을 선언하는 이름입니다.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오직 이 본문(삼하 12:25)에 한 번 등장하며, 이후에는 계속 ‘솔로몬’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 즉, ‘여디디야’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이며, 공식적인 이름은 ‘솔로몬’으로 사용됩니다.

정리하면,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 여디디야 (Yedidyah)는 '여호와께 사랑받는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식입니다. 신학적 의미는 죄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을 상징합니다.

#‘과잉 제사’ 타락으로 이어지다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고 산당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후에도 많은 제사와 성전 외의 산당을 세우며 과잉 종교화된 통치를 펼쳤고, 이방 아내들의 신들을 위한 산당도 세우게 됩니다(열왕기상 11장).

그는 아스다롯(시돈 사람의 여신), 몰렉(암몬 자손의 가증한 신) 등 여러 우상을 위하여 산당을 짓고 섬깁니다(열왕기상 11:5–8).

이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으로 여겨졌고, 다윗처럼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못했다고 평가됩니다(열왕기상 11:4,6).

하나님은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우상 숭배를 금하셨으나, 솔로몬은 듣지않았고, 이에 하나님은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에게서 왕국을 찢어 열 지파를 빼앗고, 단지 한 지파(유다)만 남길 것을 선언하십니다(열왕기상 11:11–13)

솔로몬의 제사들은 공허한 형식에 불과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양의 수’보다 ‘마음’이었다

성경 전체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은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번제나 제사를 기뻐하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호세아 6:6, 사무엘상 15:22, 시편 51:16-17 등)

하나님은 숫자나 규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과 순종을 보십니다. 천 마리의 희생제물이 아니라, 우리와의 진실된 관계에 더 집중 하십니다.

제2의 솔로몬을 꿈꾸는 이들에게 1 : 솔로몬은 몇 살에 죽었을까?

#솔로몬의 일천번제_후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측면

1. 형식적 예배와 과시적 종교행위의 전례

일천번제는 솔로몬의 전무후무한 ‘숫자 중심’ 예배였고, 후대에 이것은 숫자와 규모에 집착하는 종교문화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끔 솔로몬과 같은 부자가 되고 싶어

솔로몬의 일천번제 대신 '천일헌금',  '천일새벽기도' 등 제사의 본질(겸손, 회개, 순종)보다 외형(숫자, 규모, 시간)이 더 강조되는 양적 예배를 중시하는 경향에 빠지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 이스라엘과 유다가 겉으로는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 절기와 제물을 싫어한다”(이사야 1:11-14)

고 말씀하셨습니다.

2. 산당 제사의 정당화

일천번제가 성전이 아닌 기브온 산당에서 드려졌다는 점도 후대에 문제를 낳습니다.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정황(열왕기상 3:3)은 이후 산당 제사 관행을 정당화하는 빌미가 되었을 가능성도 시사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정하신 성전 예배를 버리고, 각지 산당에서 우상과 섞인 예배를 드리며 타락합니다.

3. 종교와 권력 결합의 나쁜 전례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왕이 종교적 권위를 갖고 대규모 제사를 주관한 사례입니다. 이는 왕권과 종교의 결합이라는 잘못된 패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후 왕들도 제사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자신이 제사장이 되려는 시도를 함.

예: 웃시야 왕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받음 (역대하 26:16~21).

4. 이방적 제사 문화와 혼합주의의 문을 엶

일천번제가 '정성과 헌신'의 표현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이후에 과잉 제사, 이방 제사 문화 흡수, 혼합주의로 확장될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솔로몬 본인도 이후에 이방 여신을 위한 산당과 제사를 세움(열왕기상 11:7).

즉, 일천번제의 ‘대규모 제사’가 형식적 외식 신앙으로 발전하여, 하나님보다 종교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문화를 낳을 위험이 있습니다.

결론:

일천번제 자체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헌신이었지만, 그 형식과 외형적 성공이 후대에 오용되며 다음과 같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1. 숫자 중심, 외형 중심 예배 문화 확산
  2. 산당 제사와 혼합주의 정당화
  3. 권력과 종교의 위험한 결합
  4. 이방 종교 요소 유입의 빌미 제공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천 번”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과 순종이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줍니다.

#기도_본질과 의미

현대 교회에서 “천일 새벽기도”, “천일 헌금”, “정해진 횟수의 소원기도” 등의 형식이 성경적 기도 정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신중하게 분별해야 할 문제입니다.

1.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기도는 단지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태복음 6:9)

로 시작합니다.

즉, 기도는 사랑과 신뢰에 근거한 자녀의 고백과 호소입니다.

  •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2. 기도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하는 수단

성경의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게 하는 과정입니다.

  • 누가복음 22:42 –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를 통해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는 이방 종교의 기복적 자세에 더 가깝습니다.

3. 기도는 반복적 형식이 아니라 진심과 믿음이 핵심

예수님은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7).

이는 형식적 반복이나 수를 채우는 기도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분량이나 시간보다 중심과 믿음을 보십니다.

  •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4. 성경은 ‘정해진 횟수나 기간’의 기도 운동을 명령하지 않음

성경 어디에도 “100일 기도”, “천일 기도”와 같은 형식적 시간 설정을 통한 소원성취 방식없습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지속적 관계의 요청이지, 기간 제한이나 횟수 달성이 아닙니다.

정리: 성경적 기도의 의미

현대 교회의 천일 기도, 100일 작정 기도 등은 의미 있는 결단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이 형식에 얽매여 ‘기도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에 맞추는 마법"아니라,

"내 마음을 하나님께 맞추는 훈련"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방법”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형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성경이 강조하는 기도는 끈기, 정직, 순종,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천일 기도”도 진심과 믿음에서 출발한다면 유익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마치 ‘응답을 얻기 위한 조건’처럼 오용된다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제2의 솔로몬을 꿈꾸는 이들에게 1 : 솔로몬은 몇 살에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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