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0:1-6_요약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과 함께 결박된 상태로 라마에 있다가, 바벨론 군대 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풀려납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이 재앙은 여호와께서 이미 예언하신 것이며, 백성의 죄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으로 함께 갈 수도 있고, 유다 땅에 남아 원하는 곳으로 갈 수도 있다고 선택권을 준다. 예레미야는 미스바에 있는 그달리야에게로 가서, 유다 땅에 남아 있는 백성과 함께 거한다.
#느부갓네살과 고레스 :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 사용된 대표적인 이방 인물
- 예레미야 40:2-3 (개역개정)
2.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이 재앙을 선포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은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바벨론의 느부사라단 장군은 이방인이지만,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 원인이 유다 백성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심판의 도구, 고레스는 회복의 도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사용된 대표적인 이방인물들입니다.
부끄럽게도 이방인조차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뜻과 진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럼, 느부갓네살과 고레스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였을까?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한 고백이지, 이들이 언약 백성으로의 믿음을 갖고 여호와만을 섬겼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여러 민족의 신들을 모두 인정하는 다신교적 관점에서 나온 표현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다신을 섬기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그들에게는 여러 다양한 민족의 종교나 우상 중의 하나 였을 것입니다.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 예레미야 40:2 (개역개정)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 ....”
현대에도 세상에는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 하나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적대'와 '인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뿐 우리는 그들을 신자라 부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고레스의 칙령(역사 문서)에는 여러 신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모든 민족이 각자의 신에게 제사드리도록 허용한 정책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다신론자들로,
그들이 믿은 ‘여호와’는 다신들 중 하나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무지와 무관심 : 잘못 사용된 자유
가장 부끄럽고 안타까운 부분은, 이방인 왕들조차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에 관심을 갖고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는데, 정작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받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 유다는 끝까지 듣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유인으로 부르셨습니다.
- 예레미야 34:13절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이스라엘을 종에서 자유인으로의 신분과 지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종"되었던 우리를 구원하셔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 된 우리의 신분과 지위의 변화와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인으로 삼으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로께서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으로 삼으신 신분과 지위의 변화와 깊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출애굽기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로마서 6:17-18
“전에 죄의 종이던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갈라디아서 5:1
하나님께서 당시의 이스라엘을, 그리고 우리를 더 이상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부르셨음을 알게 합니다.
그 변화된 신분과 지위의 존귀함과 가치의 소중함을 살아내라고 말씀해 주시는 듯 하지 않나요?
그러나, 당시의 이스라엘도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되었던 우리를 구해내셨다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충격속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라고 누누히 반복하셨던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잔소리같던 생색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배신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곧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과 우리의 가치를 깨닫길 바라셨던 아버지의 깊은 안타까움이셨다면... ...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고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생색이나 잔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자녀로 삼은 주의 백성들이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길 바라신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셨을 것 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의미와,
그 자유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인지(정체성),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가치)를 기억하게 하려는 부르심이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진심에 무지했고 무관심 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진심을 오해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욕심에 눈이 어두워 애쓴 외면이었을까요?
- 예레미야 5:21
“어리석고 지각이 없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아…”
- 말라기 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으니…”
여기서 말하는 ‘지식 없음’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자기 이익과 우상숭배를 선택했습니다.
- 이사야 1:3도 같은 맥락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심에 대해 무지했든, 무관심했든, 알면서도 외면했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서의 명예와 영광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유를 자기 욕심과 방종, 우상숭배로 오용했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영적 무너짐이 극에 달한 시기였고, 이때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자의 비참함, 즉 죄와 사망 아래 놓인 인간의 실존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시기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셨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포로기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시며 쉼 없이 일하셨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인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종이던 자리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부름 받은 새로운 신분과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 יָשַׁע (yâsha‛, 야샤)
- 뜻: 건지다, 구원하다, 해방하다, 보호하다, 안전하게 하다
- 번역 deliver, rescue, save, give victory, help
- 어근 ‘야샤’는 구약에서 가장 일반적인 ‘구원’ 동사.
예수님의 이름 "예수(예슈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רוֹר (drôr, 드로르)와 חָפְשִׁי (호프시, ḥāfshî, )
1. דְרוֹר (drôr), 드로르
뜻: 자유, 해방, 놓아줌, 면죄, 석방
구약에서 주로 노예 해방이나 자유롭게 함, 이동의 자유, 휴식의 개념으로 사용.
예) 레위기 25:10 "드로르(자유)를 부르라"
“...너희는 칠십 년이 되는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거민에게 자유(דְּרוֹר)를 공포하라...”
→ 드로르 (derôr): 노예나 빚진 자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선포
2. חָפְשִׁי (ḥāfshî, ḥopšî), 하프시
뜻: 자유로운, 해방된 (형용사)사람에 대해 “자유인”이라고 말할 때 사용
종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의 신분으로 전환된 상태, 즉“자유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미야 34:14절에 나옵니다.
אֶרֶץ חָפְשִׁים (erets ḥāfshîm) “자유의 땅” 또는 “노예가 없는 땅”을 의미
예레미야 34장 : 종에서 자유인으로, 신분과 지위의 변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유인의 삶"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때로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나는 너를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너의 하나님 네 아버지란다.”
우리가 누구인지—우리가 어떤 부르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인지, 우리의 새로운 신분과 지위의 소중한 가치를 깨달아 알길 원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에베소서 1장 18절 전체 (개역개정):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우리에게 미친 것임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문득, 장자로서의 그 신분과 지위의 소중함에 대해 무지했던 팥죽 한 그릇에 동생에게 장자권을 팔아버렸던 에서가 떠오릅니다.
#선택의 자유 :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죽느냐!?"의 문제
- 예레미야 40:4절
“이제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주었으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이 좋게 여겨지면 오라. 내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러나 만일 너에게 그것이 나쁘게 보이면 그만 두어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좋게 여기는 곳, 옳다고 여기는 곳으로 가라.”
이 구절은 느부갓네살의 군대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풀어주며 선택권을 주는 장면입니다.
- 예레미야 40:6 (개역개정)
예레미야가 가서 미스바에 사는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아에게 나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에 거하니라.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아는 당시 바벨론 왕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운 자였고, 예레미야는 남은 유다 백성과 함께하기로 결정합니다.
예레미야의 선택의 자유, 그리고 그 결말
예레미야의 말년은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과 전승을 바탕으로 몇 가지 가능한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마지막 행적은 예레미야 41장 ~ 44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운 그달랴는 미스바에서 백성들을 모아 회복을 시도하지만, 암몬의 사주를 받은 이스마엘(느다냐의 아들)에 의해 살해되고, 사람들은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요하난과 백성이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이 가야 할 길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하나님께서 보여달라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땅에서의 그들의 회복(심음과 세움)을 기도 응답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 예레미야 42:10-11(개역개정)
"너희가 이 땅에 머물러 있으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켰음이라."
“너희는 바벨론의 왕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라”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자랴와 요하난과 그 외 교만한 자들이 예레미야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며 애굽(이집트)으로 도망가는 선택을 하고, 요하난과 군대 장교들이 예레미야, 바룩, 그리고 남은 유다 백성들까지 모두 강제로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43:5–7).
이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돌아온 자들, 고관, 병사, 남녀와 아이들, 심지어 왕의 딸들까지 포함됩니다.
- 예레미야 43:6–7 (개역개정)
6절: 그들이 남유다 모든 사람 곧 사령관들과 남녀와 유아들과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이감의 아들 그달리야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데려갔으며
7절: 그들이 애굽 땅에 들어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하였음이라 그들이 다바네스에 이르렀더라.
여기서 "데려갔으며"(43:6)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וַיִּקְחוּ" (va-yiqchu), 직역하면 “그들이 (강제로) 데려갔다”로 자발적 동행이 아닌 ‘끌려간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애굽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성경 외 문헌이나 유대 전승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애굽에서 유다인들에게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그들의 반발로 인해 돌에 맞아 순교당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이 기록의 역사적 근거는 확실치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가능한 이야기로 여깁니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
예루살렘 멸망 당시 예레미야는 유다인들에게 "매국노"로 낙인찍혀 비난과 조롱, 그리고 매 맞음과 감옥에 갇혀 살던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풀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군대 사령관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동족의 손에 죽게 될 것은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오랜 고난과 동족의 불신 속에서 동족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충분히 예견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안전한 바벨론행 대신, 자신을 죽이려 들던 동족 가운데 거하는 선택을 합니다.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님께서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으로 살다가신 "예수님의 재현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유인"이셨습니다. 그는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적이 없으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십니다.
두 번째 아담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죽음을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도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두번째 아담"또는 "마지막 아담"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신 이시라” - 고린도전서 15:47
두 번째 아담은 고전 15:47에서 새 인류의 대표로서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아담(אָדָם)의 히브리어 의미는 인간, 사람(human, mankind)으로, ’ādām은 일반적으로 인류 전체, 혹은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34장 : 종에서 자유인으로, 신분과 지위의 변화
"선택의 자유"라는 말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언제나 "선택"이란 단어 앞에서 유달리 우유부단했던 내 자신 ᆢ
오늘 나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누굴 위해 죽을 것인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에 대해 ... ...
'나는 죽을 각오로
나의 선택의 자유를 사용한 적이 있었나?'
'나는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인으로서의
새 신분과 지위의 내 자신의 가치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살아왔나?'
등 에 대해 ... ...
돌아보면 죽을 각오를 하고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나의 자유를 사용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와 '자유인'이라는 새 신분과 지위에 대해서도 무지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인생을 반 바뀌 넘게 돌아 이제서야 ᆢ '라는 나의 무지함도 충격이지만, 더 멘붕인 것은 이 무지함을 깨닫는 이 순간조차 그저 멍할 뿐, 기꺼이 죽을 용기도 실력도 내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아님은 자신의 존재를 다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죽는 것으로 사용하신 사랑의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못난 나의 오늘이지만, 주께서 늦은 비 이른 비로 양육하시는 날들이니 어느 날은 좀 더 건강해지고 좀 더 멋있어져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자유" ...
하나님의 단어들을 배우는 시간 ᆢ
주님, 전 유독 input도 느리지만, output은 더더욱 느린 완고한 아이임을 주께서 아십니다. 유독 고집스러움에 언제나 남들보다 너무 더딘 저이지만, 주께서 가슴에 새겨주신 이 단어들이 삶속에서 동사와 함께 인생의 문장들이 되어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사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